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7. 7世 〉24. <부정공>증동몽교관조봉대부귀천공휘철산사실(贈童蒙敎官朝奉大夫龜川公諱哲山事實)
1. 문헌 목록 〉7. 7世 〉26. <광양공>광양공실전묘단비문(光陽公失傳墓壇碑文)
1. 문헌 목록 > 7. 7世 >  
25.<부정공>증동몽교관구천조공신단비(贈童蒙敎官龜川趙公神壇碑)
贈童蒙敎官龜川趙公神壇碑 嗚呼此谷城之竹谷面上竹谷山水洞即 端廟忠臣 贈童蒙敎官龜川趙公與其配令人竹山朴氏 設壇薦苾之所也公諱哲山字鎭卿龜川其號也系出玉川高麗侍中諱璋六世孫也曾祖諱元吉號農隱與圃牧諸賢定策立勳受封玉川府院君子姓仍貫焉祖諱瑜號虔谷官副正見麗亡入杜門洞守西 山採薇之志我太宗屢徵不起 世宗朝嘉其忠孝特下旌閭之命考諱崇文兵馬節度使 贈兵判諡節愍 光廟丙子六臣之禍立節蒙旌配食於 莊陵壇及肅慕殿庭亦享謙川祠妣貞夫人昌寧成氏達生女公自幼有氣節倜儻不覊外從成忠文公三問見其志行高潔稱許甚重噫丙子之禍尚何言哉公克服庭訓父子同時成仁則公實移孝爲忠者而其正學卓節與日月而爭光常倫大義建天地而不悖也 正宗己未贈童蒙敎官並蒙綽楔之典與六臣同配食於 莊陵壇及肅慕殿庭亦享謙川祠公之爲忠爲孝庶無餘憾而於乎偉哉夫人朴氏郡守弘文女生一男瓊孫男昌門校尉部將昌同繼珩講藝院習讀碩珩啓功郎重玲曾玄不盡錄公之後孫洪燮太善圭鎔重虞圭楠聖模允祖齎其行錄來謂余曰家禍孔慘文獻蕩佚先祖考妣生卒年月及墓所俱失無傳獻酌之禮亦是久闕往歲門議齋發以藏遺衣而設壇歲行一祀於是乎追遠之誠庶幾少伸乎方謀竪石以表之願得一言之賁余以不文辭不獲略書此俾歸鐫之一片貞珉庶可與公之忠孝之蹟同其不虧歟 時己亥小春 恩津 宋在晟撰 증동몽교관귀천조공신단비(贈童蒙敎官龜川趙公神壇碑) 아! 여기 곡성 땅 죽곡면(竹谷面) 산수동(山水洞)은 곧 단종(端宗)때 충신(忠臣) 증 동몽교관귀천(贈童蒙敎官龜川) 조공(趙公) 및 배위(配位) 영인(令人) 죽산박씨(竹山朴 氏)의 단을 모시고 향사하는 곳이다. 공의 휘는 철산(哲山)이요, 자는 진경(鎭卿)이며, 호는 귀천이고 옥천인인데 고려 시중(侍中) 장(璋)의 六세손이다. 증조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農隱)인데 포은, 목은 제현(諸賢)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고 훈공을 세워 옥천부원군의 봉작을 받으니 자손이 인하여 본관을 삼았다. 조의 휘는 유(瑜)요, 호는 건곡(虔谷)이며 벼슬은 부정(副正)인데 고려가 망함을 보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지낸 뜻을 지키고 조선 태종(太宗)이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으니 세종(世宗)때에 고 충효를 가상히 여겨 정려를 하사하였다. 고의 휘는 숭문(崇文)이요, 병마절도사로 증병판(贈兵判)에 시호는 절민(節愍)인데 세조(世祖) 병자년(一四五六) 육신의 화변에 절의를 지켜 정포(旌褒)를 받았으며 장릉 단(莊陵壇) 및 숙모전정(肅慕殿庭)에 배식하고 또 겸천사(謙川祠)에 배향하였다. 비는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 달생(達生)의 딸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기절이 있고 뛰어나 구속을 받지 않으니 외종(外從) 문충공(忠文 公) 성삼문(成三問)이 그 지행의 고결함을 보고 성대하게 칭도하고는 허락하였다. 아! 병자년 참화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공이 선대의 유훈을 이어받아 부자가 同時에 인(仁)을 이루었으니, 공은 실로 효도를 옮겨 충성을 다한 자로 그 바른 학문과 높은 절의는 해와 달로 더불어 빛을 다투고 떳떳한 윤기와 큰 의리는 천지에 세워 거스름이 없다 하겠다. 정조(正祖) 기미년(一七九九)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아울러 정문을 명하였으며, 사육신과 함께 장릉단 및 숙모전정에 배식하고 또 겸천사에 배향하였으니 공이 충성하고 효도한 것이 여한이 없게 되었으니 거룩하도다. 부인 박씨는 군수(郡守) 홍문(弘文)의 딸로 一남은 경(瓊)이요, 손남은 교위부장 (校尉部將) 창문(昌門)·창동(昌同)과 강예원습독(講藝院習讀) 계형(繼珩), 계공랑(啓功郎) 석형(碩珩) ·중형(重珩)이며, 증현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후손 홍섭(洪燮)·태선(太善)·규용(圭鎔)·중우(重虞)·규남(圭楠)·성모(聖模)·윤조(允祚)가 그 행록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되 「가화가 심히 혹독하여 문헌이 산실되고 선조고비 생졸 연월 및 묘소를 함께 잃고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어 제사를 오랫동안 지내오지 못했다가 지난해 문의가 재발하여 끼친 의복을 묻고 단을 설치하여 해마다 단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에 추원(追遠)의 정성을 조금은 이루었다.」 하겠다. 바야흐로 비를 세워서 표하고자 하니 원하건대 한 마디 써서 빛내 달라 한다. 내가 문사가 졸하여 사절하다가 부득이하여 대략 이와 같이 써서 돌려보내노니, 한 조각 비석이 공의 충효 행적과 더불어 함께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 지음
 
1. 문헌 목록 〉7. 7世 〉24. <부정공>증동몽교관조봉대부귀천공휘철산사실(贈童蒙敎官朝奉大夫龜川公諱哲山事實)
1. 문헌 목록 〉7. 7世 〉26. <광양공>광양공실전묘단비문(光陽公失傳墓壇碑文)